제목: 4장: 1859년 혁명 속 변경 분쟁의 성격 "Capítulo IV: Naturaleza de los conflictos fronterizos en la revolución del 59“ en 아라우카니아를 향한 첫 번째 전진, 앙골, 1862, El Primer Avance a la Araucanía, Angol 1862, Temuco, Chile, Universidad de la Frontera, 1984. pp. 5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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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아르투로 레이바 Arturo Leiva
자료근거: 1859년에서 1861년 사이 엘 코레오 델 수르 지(신문)와 El Correo del Sur와 엘 메르쿠리오 지(신문)El Mercurio 의 기사. 베르나르디노 프라델 Bernardino Pradel이 마푸체 땅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군 장교 비야론 Villalón과 역시 군 장교인 바르보사 Barbosa가 보낸 보고서, 나시미엔토 Nacimiento 시민들이 지방 의원에게 보낸 편지.
요약: 1859년에서 1861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의 참뜻을 알려면 먼저 변경의 사회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변경은 칠레 사람과 마푸체 족이 서로 관계를 맺는 장소, 마푸체가 칠레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칠레인이 마푸체에게 끼치는 영향보다 더 큰 곳이었다.
덧붙여 비오비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양쪽 사회 다 비슷한 정치 현상을 겪었다. 마푸체 사회에는 칠레인을 밀어주는 무리(이를 테면 피놀레비 Pinolevi, 콜리피 Colipi, 마리만 Marimán 같은 이들)가 있고, 칠레사회에는 마푸체를 도와주는 무리(이를테면 몬토네로스 montoneros: 말을 타고 다니는 무장 집단)가 있었다. 1859년 혁명 중에 칠레정부는 마푸체 편을 드는 무리를 공격했고, 마푸체 다수사회는 칠레 편을 드는 마푸체(이를 테면 마리만Marimán)를 공격했다. 두 사회다 정치면에서 변열되어 있던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1859년 혁명에서 변경 세력 중에 마푸체와 동맹했던 파가 져 칠레 내부 정치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긴 집단도 1859년 동안 마푸체의 공격에 비오비오 강 남쪽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러자 승자들은 칠레 정부에게 비오비오너머의 마푸체들에게서 손해배상 Reparaciones 을 받아낼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칠레 사회 내부에 이런 흐름을 저지할 동맹세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마푸체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정부는 지금까지 변경에서 마푸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냐에 변경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문제보다 더 많이 관심을 쏟아왔다. 그러나 이제 변경민들이 정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마푸체는 가운데서 밀려놨다. 변경민들은 자기들이 "오랑캐들에게 당한" 피해액을 들이밀며 정부에게 보상을 받아낼 것을 요구했다. 변경민들 스스로 한 계산에 따르면 손해가 무지막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당사자들이 직접 한 계산이긴 하지만 틀린 계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배상금을 타내라고 하는 게 꼭 전쟁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엘 메르쿠리오도 한 번은 땅과 가축으로 보상금을 타내자고 하면서도 전쟁의 효과는 미심쩍어하는 의견을 실었다. 엘 코레오 델 수르 지도 "마푸체는 뒤로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우릴 이길 것이다.'고 쓰며 전쟁을 함부로 생각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1860년과 1861년에 칠레 정부는 결국 군사 원정을 벌였다. 그리고 변경 사람들은 그런 원정을 매우 반겼다. 허나 군대는 맞서 싸울 마푸체를 만나지 못했다. 마푸체는 칠레 군대의 뒤를 돌아 무방비 상태에 있던 변경 요새 도시들을 위협했다. 결국 1861년 1월 15일에는 마푸체들이 나시미엔토 요새 마을 가까이에 나타나 가축을 쓸어가는 일이 일어났다. 그 사이 비야론이 이끄는 칠레 군은 지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마푸체 가축과 재물을 털고 농경지를 부수고 있었다. 이에 메르쿠리오의 한 사설은 적을 부수지도 못하고 재물만 턴 군대의 비겁함과 무능함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이 시점까지 아직 칠레 정부에는 아라우카니아 안쪽으로까지 전쟁을 밀어붙일 계획이 서 있지 않았다.
1859년에서 1861년이 끝날 때까지 변경은 아무도 들어가기 힘든 텅 빈 공간이 되어 있었다. 마푸체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위험한 일이 되었다. 한 날은 날까 nalca(먹을 수 있는 식물의 한 종류)를 모으러 비오비오 남쪽으로 간 청년 셋과 장사를 해 보려 역시 비오비오 남쪽으로 간 청년 셋이 마푸체 순찰대에 걸려서 죽음을 당했다. 이제 마푸체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불가능한 일, 아니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 상황을 잘 보여주는 문서가 바로 나시미엔토 시민 상당수가 1859년에 그 지역 의원인 프란시스코 푸엘마 Francisco Puelma에게 공동으로 보낸 편지다. 엘 메르쿠리오 지에 실린 이 편지에서 시민들은 나시미엔토 주민들은 마푸체들이 저지른 약탈로 심각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마푸체들이 공격할 위험에도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다. 편지에 따르면 나시미엔토를 파괴하기 위해 마푸체들끼리 회의를 한 적도 있었는데 칠레 편에 선 마푸체인 피놀레비가 반대한 덕분에 겨우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었다. 편지는 칠레가 변경 칠레인들에게 피해를 준 마푸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일은 국가의 수치이며 정부는 마땅히 마푸체 중 지금 상황에 책임이 있는 자를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앙골 지역을 완전 정복하여 마예코 Malleco 강 북쪽에 있는 마푸체 부족들을 겁주고 땅과 가축으로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게 강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평가: 앙골에 요새도시를 세우기 바로 전에 변경 칠레인들 민심이 어땠을 것이라는 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한 글이다. 재밌는 것은 '변경'은 마푸체와 칠레 세력 양쪽이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는 곳이라고 말 해 놓고, 정작 분석에선 칠레인들 관점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 중심 사회가 아니었던 마푸체 사회에서 나온 자료가 모자라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양쪽에 다 비슷한 일이 비슷한 무게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마푸체 땅 안에 몇 주씩 머물면서 마푸체의 재산을 파괴한 칠레 군대와 칠레 변방 요새 남쪽에서 한 번 가축을 쓸어가는 게 고작이었던 마푸체의 힘은 절대 당시 지방지들에서 부풀려 말한 만큼은 강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칠레 군대는 심심하면 변경선을 넘어 들어가고, 마푸체는 어지간해선 요새선을 넘지 못 한다. 이게 '동등' equivalencia인가? 칠레인이 잃었다는 재산도 결국 마푸체 영토 안에서 잃은 것이 거의 다이며 마푸체는 비오비오 북쪽에 잃을 재산도 별로 가져보지 못했다. 이게 동등인가?
배상을 요구하는 칠레 지주들의 외침은 마치 '평화롭게' 아편을 팔다가 하다가 청 원주민이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자 "저 야만인들이 평화를 깨트렸다!"고 소리쳤던 영국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에 이런 일이 세계 몇 군데에서 몇 번이나 일어났을지 세 보면 재밌으리라.
인용할 만한 부분: "칠레 군대가 저항 없이 전진하는 동안 인디오 적들은 후방을 잡으며 공격할 길을 찾아냈다." p.61.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라우카노들이 먹고 사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을 모조리 부수거나 없애 버리는 일이지요. 아라우카노 생존자들을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게 해서 우리 권위에 복종하게 하려 한 겁니다. 이 일을 하면서 마예코에서 카우틴 Cautín 강 구석까지 돌며 모든 밭을 박살냈습니다. 우리가 지나간 모든 밭은 다 태우고 쑥밭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인디오들은 엄청난 피해를 겪었습니다. 가축은 죽여 버린 걸 빼면 400 마리를 아라우코 주에 가져왔습니다." pp. 61-62. 비센테 비야론 Vicente Villalón이 1861년 칠레 전쟁성에 보낸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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