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 1862 4장: 1859년 혁명 속 변경 분쟁의 성격 읽은 책과 논문

제목: 4: 1859년 혁명 속 변경 분쟁의 성격 "Capítulo IV: Naturaleza de los conflictos fronterizos en la revolución del 59“ en 아라우카니아를 향한 첫 번째 전진, 앙골, 1862, El Primer Avance a la Araucanía, Angol 1862, Temuco, Chile, Universidad de la Frontera, 1984. pp. 54-65.

 

글쓴이: 아르투로 레이바 Arturo Leiva

 

자료근거: 1859년에서 1861년 사이 엘 코레오 델 수르 지(신문)El Correo del Sur와 엘 메르쿠리오 지(신문)El Mercurio 의 기사. 베르나르디노 프라델 Bernardino Pradel이 마푸체 땅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군 장교 비야론 Villalón과 역시 군 장교인 바르보사 Barbosa가 보낸 보고서, 나시미엔토 Nacimiento 시민들이 지방 의원에게 보낸 편지.

 

요약: 1859년에서 1861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의 참뜻을 알려면 먼저 변경의 사회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변경은 칠레 사람과 마푸체 족이 서로 관계를 맺는 장소, 마푸체가 칠레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칠레인이 마푸체에게 끼치는 영향보다 더 큰 곳이었다.

덧붙여 비오비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양쪽 사회 다 비슷한 정치 현상을 겪었다. 마푸체 사회에는 칠레인을 밀어주는 무리(이를 테면 피놀레비 Pinolevi, 콜리피 Colipi, 마리만 Marimán 같은 이들)가 있고, 칠레사회에는 마푸체를 도와주는 무리(이를테면 몬토네로스 montoneros: 말을 타고 다니는 무장 집단)가 있었다. 1859년 혁명 중에 칠레정부는 마푸체 편을 드는 무리를 공격했고, 마푸체 다수사회는 칠레 편을 드는 마푸체(이를 테면 마리만Marimán)를 공격했다. 두 사회다 정치면에서 변열되어 있던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1859년 혁명에서 변경 세력 중에 마푸체와 동맹했던 파가 져 칠레 내부 정치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긴 집단도 1859년 동안 마푸체의 공격에 비오비오 강 남쪽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그러자 승자들은 칠레 정부에게 비오비오너머의 마푸체들에게서 손해배상 Reparaciones 을 받아낼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칠레 사회 내부에 이런 흐름을 저지할 동맹세력도 남아 있지 않아서 마푸체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정부는 지금까지 변경에서 마푸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냐에 변경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문제보다 더 많이 관심을 쏟아왔다. 그러나 이제 변경민들이 정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마푸체는 가운데서 밀려놨다. 변경민들은 자기들이 "오랑캐들에게 당한" 피해액을 들이밀며 정부에게 보상을 받아낼 것을 요구했다. 변경민들 스스로 한 계산에 따르면 손해가 무지막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당사자들이 직접 한 계산이긴 하지만 틀린 계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배상금을 타내라고 하는 게 꼭 전쟁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엘 메르쿠리오도 한 번은 땅과 가축으로 보상금을 타내자고 하면서도 전쟁의 효과는 미심쩍어하는 의견을 실었다. 엘 코레오 델 수르 지도 "마푸체는 뒤로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우릴 이길 것이다.'고 쓰며 전쟁을 함부로 생각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1860년과 1861년에 칠레 정부는 결국 군사 원정을 벌였다. 그리고 변경 사람들은 그런 원정을 매우 반겼다. 허나 군대는 맞서 싸울 마푸체를 만나지 못했다. 마푸체는 칠레 군대의 뒤를 돌아 무방비 상태에 있던 변경 요새 도시들을 위협했다. 결국 1861115일에는 마푸체들이 나시미엔토 요새 마을 가까이에 나타나 가축을 쓸어가는 일이 일어났다. 그 사이 비야론이 이끄는 칠레 군은 지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마푸체 가축과 재물을 털고 농경지를 부수고 있었다. 이에 메르쿠리오의 한 사설은 적을 부수지도 못하고 재물만 턴 군대의 비겁함과 무능함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이 시점까지 아직 칠레 정부에는 아라우카니아 안쪽으로까지 전쟁을 밀어붙일 계획이 서 있지 않았다.

1859년에서 1861년이 끝날 때까지 변경은 아무도 들어가기 힘든 텅 빈 공간이 되어 있었다. 마푸체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위험한 일이 되었다. 한 날은 날까 nalca(먹을 수 있는 식물의 한 종류)를 모으러 비오비오 남쪽으로 간 청년 셋과 장사를 해 보려 역시 비오비오 남쪽으로 간 청년 셋이 마푸체 순찰대에 걸려서 죽음을 당했다. 이제 마푸체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불가능한 일, 아니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 상황을 잘 보여주는 문서가 바로 나시미엔토 시민 상당수가 1859년에 그 지역 의원인 프란시스코 푸엘마 Francisco Puelma에게 공동으로 보낸 편지다. 엘 메르쿠리오 지에 실린 이 편지에서 시민들은 나시미엔토 주민들은 마푸체들이 저지른 약탈로 심각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마푸체들이 공격할 위험에도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다. 편지에 따르면 나시미엔토를 파괴하기 위해 마푸체들끼리 회의를 한 적도 있었는데 칠레 편에 선 마푸체인 피놀레비가 반대한 덕분에 겨우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었다. 편지는 칠레가 변경 칠레인들에게 피해를 준 마푸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일은 국가의 수치이며 정부는 마땅히 마푸체 중 지금 상황에 책임이 있는 자를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앙골 지역을 완전 정복하여 마예코 Malleco 강 북쪽에 있는 마푸체 부족들을 겁주고 땅과 가축으로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게 강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평가: 앙골에 요새도시를 세우기 바로 전에 변경 칠레인들 민심이 어땠을 것이라는 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한 글이다. 재밌는 것은 '변경'은 마푸체와 칠레 세력 양쪽이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는 곳이라고 말 해 놓고, 정작 분석에선 칠레인들 관점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 중심 사회가 아니었던 마푸체 사회에서 나온 자료가 모자라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양쪽에 다 비슷한 일이 비슷한 무게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마푸체 땅 안에 몇 주씩 머물면서 마푸체의 재산을 파괴한 칠레 군대와 칠레 변방 요새 남쪽에서 한 번 가축을 쓸어가는 게 고작이었던 마푸체의 힘은 절대 당시 지방지들에서 부풀려 말한 만큼은 강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칠레 군대는 심심하면 변경선을 넘어 들어가고, 마푸체는 어지간해선 요새선을 넘지 못 한다. 이게 '동등' equivalencia인가? 칠레인이 잃었다는 재산도 결국 마푸체 영토 안에서 잃은 것이 거의 다이며 마푸체는 비오비오 북쪽에 잃을 재산도 별로 가져보지 못했다. 이게 동등인가?

배상을 요구하는 칠레 지주들의 외침은 마치 '평화롭게' 아편을 팔다가 하다가 청 원주민이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자 "저 야만인들이 평화를 깨트렸다!"고 소리쳤던 영국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에 이런 일이 세계 몇 군데에서 몇 번이나 일어났을지 세 보면 재밌으리라.

인용할 만한 부분: "칠레 군대가 저항 없이 전진하는 동안 인디오 적들은 후방을 잡으며 공격할 길을 찾아냈다." p.61.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라우카노들이 먹고 사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을 모조리 부수거나 없애 버리는 일이지요. 아라우카노 생존자들을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게 해서 우리 권위에 복종하게 하려 한 겁니다. 이 일을 하면서 마예코에서 카우틴 Cautín 강 구석까지 돌며 모든 밭을 박살냈습니다. 우리가 지나간 모든 밭은 다 태우고 쑥밭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인디오들은 엄청난 피해를 겪었습니다. 가축은 죽여 버린 걸 빼면 400 마리를 아라우코 주에 가져왔습니다." pp. 61-62. 비센테 비야론 Vicente Villalón1861년 칠레 전쟁성에 보낸 보고서.


에스파냐란 과거를 극복하기: 19세기의 라틴아메리카 자유주의와 식민 역사라는 짐: 칠레의 경우 “ 읽은 책과 논문

제목: 에스파냐란 과거를 극복하기: 19세기의 라틴아메리카 자유주의와 식민 역사라는 짐: 칠레의 경우 “Sobrellevar el pasado español. Liberalismo Latinoamericano y la carga de la historia colonial en el siglo XIX: El Caso Chileno", en 19세기 칠레의 민족과 민족주의 Nación y nacionalismo en Chile. Siglo XIX, Santiago, Centro de Estudios Bicentenario, 2009. pp. 117-136.

 

글쓴이: 게르트루데 M. 예거, Gertrude M. Yaeger

 

이론 틀: 예거는 사회변화가 위대한 지식인 몇몇이 퍼뜨린 사고방식에 대중이 따라가고, 이에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본다. 그래서 크리오요 자유주의 역사가들의 에스파냐 체제 긍정을 피노체트 재선 거부 투표와 연관 짓는 것이다.

 

자료 근거: 19세기 칠레 역사가들이 쓴 글.

 

요약:

도입: 1988105일 국민투표에서 칠레인들이 피노체트 정권 연장을 거부하고, 악마 같던 피노체트도 이를 받아들인 것은 칠레에선 보수파도 "신중한 자유주의"자라는 자유주의 사학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칠레 역사를 자유를 찾는 여행으로 본 자유주의 사학자들은 보수주의자 안드레스 베요 Andres Bello의 제자로서 에스파냐라는 과거에서 시민 정신을 찾을 수 있다는 베요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에스파냐 식민지였다는 과거는 모든 에스파냐 아메리카에 마찬가지이므로 여기서는 칠레 경우를 그러한 더 넓은 맥락 안에서 분석하겠다.

I. 에스파냐란 과거와 식민 역사란 짐: 에스파냐 제국이란 옛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크리오요 독립 공화국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에스파냐 제국을 무너뜨렸지만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반듯한 새 체제를 재빨리 세우진 못했다. 온 사회가 뒤죽박죽 싸움판이 되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미국은 얼마 안 되어 튼튼하고 잘 사는 나라를 세웠다. 에스파냐는 시대착오의 상징이, 북유럽은 진보의 상징이 되어갔다. 이에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도 에스파냐라는 옛날을 미워하고 북유럽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스파냐라는 과거를 보는 데에도 다양한 관점이 있었다. 특히 멕시코에서 이 문제를 다른 돋보이는 글들이 나왔다. 카를로스 마리아 데 부스타만테 Carlos María de Bustamante는 에스파냐 전통 대신 아스텍이란 과거를 기억하자고 했다. 루카스 알라만 Lucas Alamán과 루이스 쿠에바스 Luis Cuevas는 에스파냐 제도는 좋은 것이고 바꿀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호세 마리아 루이스 모라 José María Luis Mora는 에스파냐의 발자취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있다고 했다. 루이스 사발라 Luis Zavala는 식민지의 유산을 모조리 없애고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주체들이 논쟁에 참여한 멕시코와 달리 아르헨티나에선 좀 더 젊은 세대가 논쟁에 끼어들었다. 자칭 "젊은 아르헨티나"인 이 세대는 대개 망명 중에 자기 사상을 가다듬었다. 에스파냐의 지배에는 좋은 것도 있었다고 인정한 멕시코 지식인 대부분과 달리 아르헨티나 지식인들은 식민지배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 했다. 자기 스승들과 달리 "젊은 아르헨티나"는 외국 것으로부터 옮겨심은 중앙집권 민주주의는 실패했고 아르헨티나에는 잘 배운 소수가 다스리는 연방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II. 아르헨티나 지식인들, 베요, 라스타리아: 칠레 보수정부는 외국 지식인들에게 관대했으며 발파라이소는 국제 항구로서 이름이 높았다. 거기다 주 칠레 아르헨티나 대사이자 사업가, 장서수집가였던 그레고리오 베에체 Gregorio Beéche가 발파라이소 Valparaíso에서부터 지식인들을 후원했다. 덕분에 칠레에는 남아메리카 전역에 떠돌던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라 플라타 강 유역을 지배하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Juan Manuel De Rosas 정권을 피해 온 아르헨티나 지식인들 또한 그렇게 칠레에 온 이들 가운데 일부였다.

로사스 정권을 뒤집길 바라는 과격한 아르헨티나 지식인-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Domingo Faustino Sarmiento, 비센테 피델 로페스 Vicente Fidel López, 후안 마리아 구티에레스 Juan María Gutiérrez,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Juan Bautista Alberdi들과 칠레 보수주의 정부 사이의 긴장은 칠레 민족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아르헨티나인들은 당시 칠레 같은 법치 독재국가를 꿈꾸는 이들이었지만 이들이 아르헨티나 로사스 정권에 끊임없이 퍼부은 공격은 칠레 정부를 미워하던 칠레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 인들과 논쟁으로 칠레인은 역사를 무기로 가다듬었고 이는 베요의 업적이었다.

1840년 초부터 베요와 아르헨티나 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양쪽 다 헌정공화정부, 교육, 미래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한 의견일치도 있었다. 사르미엔토는 이 시기에 정치를 다룬 대표작 파쿤도 Facundo를 썼고, 칠레 대학 설립에 관여하면서 대중교육론을 세웠다. 베요도 이런 흐름을 보탰지만 디에고 포르탈레스 Diego Portales(1833년에 선 칠레 보수정권의 실권자. 대통령은 아니었다.)와 맺은 관계 때문에 반동주의자란 의심을 받았다.

베요는 영국에 살 때 프랑스와 라틴아메리카 혁명이 과도하단 인상을 받았고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토크빌처럼 베요도 자유를 지키려면 민주주의 체제는 지역 전통을 지키며 천천히 커야만 한다고 믿었다. 베요는 칠레 1833년 헌법 작성, 국제법, 에스파뇰 표준화에 기여했고 칠레 대학 초대 학장이기도 했다.

1842년부터 칠레 정부는 칠레 대학 연례행사로 대중 앞에서 가장 잘 쓴 역사 논문을 읽도록 했다. 역사논문은 역사지식에 공헌하지만 정열에 차진 않은 것을 요구하였다. 첫 논문 발표 자격은 호세 빅토리노 라스타리아 José Victorino Lastarria에 돌아갔다. 라스타리아는 사르미엔토처럼 역사를 미래를 열기 위한 철학의 도구로 보았고 베요를 비판했지만 앞서 말한 역사 논문 발표 임무를 맡긴이는 베요였다. 논문 발표에서 라스타리아는 에스파냐 식민지배 체제가 아메리카 사람들 개인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노예 심리로 물들였다며 격렬히 비판하고 조속히 모든 식민유산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베요는 라스타리안의 논문에 반발하였다. 베요는 정복 당시 시대의 기준으로 에스파냐를 이해하지 않고 자기 시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라스타리아를 비판하고, 에스파냐 체제에 대한 평가를 미루고 사건 나열에 집중한 클로드 게이 Claude Gay의 역사책을 옹호하였다. 거기다 베요는 에스파냐 체제에도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이 마음이 칠레인들로 하여금 자유를 찾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스타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기심과 대중의 반사회성이 특징인 에스파냐 정신은 1840년 들어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베요가 대표하는 식민지식 교육 때문에 아직도 살아있다고 다시 한 번 비난을 퍼부었다. 다른 자유주의자인 프란시스코 빌바오 Francisco Bilbao도 가톨릭 교회와 에스파냐 전통을 반동이라고 공격하고 아라우카노(마푸체) 정신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이렇게 베요와 라스타리아는 칠레 자유주의 민족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칠레에 자유주의 역사학을 일으킨 이들은 라스타리아가 아니라 베요의 길을 쫓았고 보수주의 정권을 자유주의라는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III. 칠레 공화국의 바탕을 이룬 자유주의: 미겔 루이스 아무나테기 Miguel Luis Amunátegui1849년에 에스파냐 재정복La reconquista española, 1852년에 칠레 혁명 첫 세 해Los tres primeros años de la revolución en Chile 로 칠레 자유주의 사학에 새 장을 열었다. 아무나테기는 공화주의 제도가 포르탈레스와 따로 성장했고, 에스파냐 재 정복 이전에도 칠레 공화국에 다양한 정당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아무나테기가 펴낸 오히긴스의 독재La dictadura de O'Higgins는 오히긴스를 독재자로 비판하며 역사가 당시의 권위주의 정부도 에둘러 비판하고 독재 정부는 시민이 쫓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널리 퍼뜨렸다. 다른 자유주의자들처럼 검열을 피해 정부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독립 초기에 혼란을 일으킨 것도 에스파냐 식민체제에서 정치교육을 받지 못해 정치에 무식해서였을 뿐이라고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했다.

칠레 자유주의자들은 1860년에 정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씩 에스파냐라는 과거와 화해하기 시작했다. 1861년 아무나테기는 에스파냐에서 칠레에 온 정복자들은 용감하고 자유를 사랑하던 이들이었다며 칠레 자유주의의 근원을 권위주의 정부가 아닌 칠레를 정복한 자유롭고, 용감하고, 검소한 개인들에서 찾았다. 그리고 1870년에 내놓은 책 칠레 독립의 선구자들Los precursores de la independencia de Chile에서는 칠레인들이 1810년에 해방 이념을 받아들였으며 독립지도자들의 행동엔 모순과 비일관성도 있었지만 이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있는 약점이라 하였다.

비쿠냐 막켄나 Vicuña Mackenna는 건국의 아버지 상을 만들어냈다. 막켄나가 1857년에 쓴 책 카레라 형제와 오히긴스 장군의 도편추방El ostracismo de los Carrea y El ostracismo del general O'Higgins에서 막켄나는 카레라 형제와 오히긴스 사람다운 결함이 있었지만 둘 다 칠레 자유에 공헌했고 칠레 역사는 폭정과 자유의 싸움이라 주장했다. 아무나테기가 엘리트가 읽을 역사를 썼다면 막켄나는 이렇게 대중을 위한 영웅 이야기를 썼다.

바로스 아라나 Barros Arana는 여기에 체계있는 역사관을 도입했다. 이른바 "과학적 역사가" Historiador científico로서 아라나는 25년 동안 자료를 모은 뒤 1884년에 칠레 총사Historia Jeneral de Chile를 쓰기 시작했다. 그 책에서 아라나는 공화정과 자유정신은 초기 식민정복자들과 함께 칠레에 왔으며 에스파냐 전통엔 자유의 씨앗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라나는 칠레 자유주의 체제의 기원은 에스파냐 중세의 카빌도 Cabildo 의회와 본국이 멋대로 내린 칙령에 저항한 칠레 크리오요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스 아라나와 같은 역사 쓰기 흐름 속에서 페드로 데 발디비아 Pedro de Valdivia,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호세 미겔 카레라 José Miguel Carrera등이 에스파냐인다운 장점과 단점이 있는 영웅으로 되살아났다.

에스파냐 문명 미화와 함께 칠레 원주민의 칠레 역사 속 지위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칠레 원주민의 미덕이라야 에스파냐 문명에 저항한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1854년에 마푸체 지도자 카우폴리칸 Caupolicán을 상세히 묘사했던 아무나테기가 20년 뒤엔 원주민을 반성할 줄 모르는 야만인으로 그렸다. 아라나는 다윈주의를 적용해 마푸체가 열등했다고 썼다.

이렇게 1880년대까지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베요의 지도를 받으며 방대한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보수정권도 수용할 만한 실증적 민족주의, 자유주의에 따른 민족주의를 일으켰다. 목축업자, 농사꾼, 포도주 수출상 같은 보통 칠레인도 미덕을 갖춘 존재란 평가를 받았으며 이베리아 사람다운 칠레인의 성격은 별 매력이 없는 칠레의 자연 속에 순화되었다고 하였다. 금광도 없고 호전적인 원주민이 우글대는 칠레엔 오직 검소하고 의지가 강한 이만 찾아왔다.

자유주의 사학의 성공은 자유주의의 적대자들조차 그 방식을 따라하게 했다. 뒷날 산티아고 대주교가 된 크레센테 에라수리스 Cresente Errázuriz는 수많은 자료를 모아 가톨릭 성직자들을 편 드는 역사를 썼다. 에라수리스는 가톨릭 성직자들은 에스파냐 사람들한테서 원주민을 지키려 싸웠으며, 에스파냐의 지나친 간섭은 성직자들을 독립 혁명의 선구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에라수리스에서 볼 수 있듯 이제는 칠레 자유주의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개인 자유가 공화국의 대들보란 점을 인정하였다. 이렇게 널리 퍼진 "신중한 자유주의"1860년 이후 칠레가 "정치 쪽으론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가 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IV. 19세기의 라틴아메리카 자유주의와 에스파냐라는 과거: 라틴아메리카는 세상에서 가장 긴 탈식민주의 역사 쓰기 전통을 갖춘 대륙이다. 독립으로 원하는 사회를 즉시 얻지 못한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그 원인을 식민지배 역사에서 찾았다. 식민지 잔재가 어떻게 현재 역사에 영향을 미쳤나를 따졌다. 또 한편,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식민지 모델을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대체하려 하고 자신들을 유럽 노동계급과 한편으로 본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지식인들과 달랐다.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유럽 자유주의 모델을 흔히 무비판으로 받아들였다.

50년 정도가 지나 공화국 체제가 반석에 앉으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식민지 과거를 조금씩 긍정하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아르헨티나도 칠레와 거의 같은 경향을 보였다. 한 보기로 바르톨로메 미트레 Bartolomé Mitre는 에스파냐의 잘못은 식민지배 체제가 아니라 식민지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주장했다. 북아메리카 역사가들처럼 미트레도 신세계엔 늙은 구세계에 자유를 새로 가르칠 사명이 있다고 주장했다. 북미와 남미엔 아무 차이도 없었다.

식민지 과거와 화해가 가능했던 것은 라틴아메리카 사회 문화 동질성이 높은 수준에 이르러서이기도 하였다. 멕시코 역사가 호세 페르난도 라미레스 José Fernando Ramírez는 멕시코엔 에스파냐 역사도 있고 아스텍 역사도 있다면서 멕시코는 메스티소 민족이라는 역사관을 내놓았다. 멕시코의 자유주의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이 역사관은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며 멕시코 혁명 때도 도입되었다. 몇 안 되는 살아남은 원주민 집단은 거의 안중에도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실증주의와 사회과학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포르피리오 디아스 집권 시기(1876-1910) 때 역사가인 프란시스코 불네스 Francisco와 프란시스코 코스메스 Francisco Cosmes의 학파는 콜럼버스 이전 문명을 깎아내리는 역사를 썼고 루이스 곤살레스 오브레곤Luis Gonzálo Obregón과 후스토 시에라 Justo Sierra는 원주민 인구에 진정한 민족정체성의 대표자란 지위를 주었다. 라미레스처럼 메스티소 인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가도 계속 있어왔다. 과테말라와 안데스 지역에선 동화되지 않은 원주민 인구가 지식인들의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1891년을 기점으로 에스파냐 과거를 긍정하는 흐름은 대세가 되었다. 미국의 위협도 에스파냐 문화를 더욱 더 긍정하게 하였다. 19세기 에스파냐 지식인들이 에스파냐에 대해 고민했다면 20세기 지식인들의 고민꺼리는 이제 미국이었다.

 

평가: 라틴아메리카의 크리오요 자유주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에스파냐 식민 지배를 조금씩 긍정하게 되었나를 칠레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한 글이다. 이 글 한편만 봐도 왜 에스파냐에서 독립했다는 칠레에서 에스파냐 정복자 이름을 따 거리와 대학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가브리엘 살라사르 같은 이른바 '진보주의 역사가'가 에스파냐인들이 한 아메리카 정복은 (유럽 중세) 민주주의가 아메리카에서 부활 Resurección Democrática한 것이라는, 선주민족들 앞에서 읽었다간 돌 맞을 소리를 서슴없이 쓰는 데에는 이런 자유주의 전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을 지나치게 사상사 흐름에서만 살피고 그 뒤에 얽힌 정치사회경제, 인종주의의 이해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점은 흠이다.

라틴아메리카처럼 한국에서도 해방 뒤 50년이 좀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일본에 조만간 다시 정복당할 위험이 거의 사라진 지금, 조금씩 일본 식민지배를 긍정하고, 카우폴리칸 같이 정복자에 무력으로 맞선 이를 테러리스트(야만인)으로 보는 움직임이 한국에서도 보인다. 칠레의 발디비아 대학처럼 한국에서도 이완용 대학 같은 것이 언젠가는 들어설라나? 어쨌든, 체제 안정과 더불어 식민지 과거에 대한 긍정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인용할 만한 부분: 자유주의와 민족이 식민지 과거와 화해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순간,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이라는 원주민의 지위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만약 자유주의자들이 공격해 온 나쁜 성질이라는 것을 모두 에스파냐 인들의 특징이라 할 수 없다면 원주민을 옹호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진다. 원주민의 가장 큰 덕목이란 에스파냐 문명에 저항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p. 131.


구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 이론에 대한 오해 역사

구스타브 르 봉의 1895년 책 "군중심리" Psychologies des Foules 본문 첫 문장들.

Notre précédent ouvrage a été consacré à décrire l'âme des races. Nous allons étudier maintenant l'âme des foules.
L'ensemble de caractères communs que l'hérédité impose à tous les individus d'une race constitue l'âme de cette race. Mais lorsqu'un certain nombre de ces individus se trouvent réunis en foule pour agir, l'observation démontre que..., du fait même de leur rapporchement, résultent certains caractères phychologiques nouveax qui se superposent aux caractères de race, et qui parfois en diffèrent profondément.

우리 지난 책은 인종들의 영혼을 설명하는 데 바쳤다. 이번에 우리는 군중의 영혼을 연구할 것이다.

한 인종의 모든 개인에 유전으로 새겨진 공통 특징이 한 인종의 영혼을 이룬다.
하지만 그런 개인들이 특정 수 이상의 군중으로 모여 행동할 때를 보면
단지 가까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심리 현상이 보임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심리는 인종의 특징을 덮어버리며 많은 경우 인종 정신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군중을 개인과 대비한 게 르봉의 '군중심리' 이론이 아닙니다. 군중 심리을 각 "인종"들의 심리와 대비한 게 군중심리 이론입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도록 합시다(...). 대체 이게 어떻게 국내에 '개인 대 군중'이란 틀로 퍼진 거지...-_-;;;

제가 칠레에 있어 국내판을 직접 확인하진 못 했는데 아는 분 말에 따르면 번역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군중의 특성들을 고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한 민족의 타고난 특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 민족 구성원 개개인에게 공통적으로 유전된 모든 특성이다. 이런 개인들이 어떤 행위를 목적으로 여러 명이 한데 모여 군중이 될 때, 그들을 관찰한 기록들은 그들이 한데 모였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새로운 심리적 특성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증명한다.-

race는 모조리 '민족'으로 번역되어 있다고 하며, "우리 지난 책은 인종들의 영혼을 설명하는 데 바쳤다."는 완전히 잘려 나갔습니다. 번역자 김성균 씨가 멋대로 왜곡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영문판을 번역한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앙골 1862 3장: 침투 받는 변경 읽은 책과 논문

제목: 3장: 침투 받는 변경 "Capítulo III: La Frontera bajo Infiltración“ en 아라우카니아를 향한 첫 번째 전진, 앙골, 1862, El Primer Avance a la Araucanía, Angol 1862, Temuco, Chile, Universidad de la Frontera, 1984. pp. 42-53.

글쓴이: 아르투로 레이바 Arturo Leiva

자료근거: 칠레 변경 관리들이 자신들에게는 마푸체의 "나쁜 행동"을 막을 힘이 모자라다고 중앙 정부에 불평하는 문서와 마푸체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남긴 문서. 엘 꼬레오 델 수르 El Correo del Sur지의 사설.

요약: 마푸체가 토지 가격을 몰랐다거나, 사기를 당했다거나, 판다는 것...은 영원히 잃는다는 것을 몰랐다며 마푸체를 바보 취급하는 당시 언급은 당시에 마푸체를 바라보던 칠레 주류 시각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칠레 주류의 시각은 마푸체를 성질 급하고, 자존심 세고, 쉽게 성내서 평화를 깨트리는 이들로 그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푸체는 정말 토지를 팔았다고 인정한 일이 없으며 여차하면 폭력을 휘두르며 칠레인의 권리 행사를 방해했다.
당시 문서도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나시미엔토 Nacimiento 요새 부속 행정구역 네그레테 담당관 호세 마리아 세풀베다 José Maria Sepúlveda가 1856에 남긴 기록을 보면 토지 구매자가 땅을 실제로 차지하는 것을 마푸체 70명 정도가 무기를 들고 와서 폭력으로 막아서 하마터면 구매자들이 크게 다칠 뻔 했다고 한다. 문서에 나오는 거친 표현이나 말, 틀린 철자법 역시 마푸체를 닮아 수준 낮은 변경 현실을 잘 보여준다.
친구 대장 마리아노 라고스 Mariano Lagos가 보낸 편지도 침투 상황의 변경 현실을 잘 보여준다. 구엔추만(두케코 섬 Duqueco) Guenchumán 족장이 가축을 도둑맞아서 무장한 부하들을 보내 가축을 찾았다. 숩델레가도(Subdelegado: 칠레 지방관직 이름) 야녜스 Yáñez 땅에서 가축을 찾고 돌려 달라 했다. 야녜스는 자기도 구엔추만에게 옛날에 도둑을 맞았다며 돌려주길 거부했다. 구엔추만이 칼부코이 Calbucoi와 안티체오 Anticheo를 만나 야녜스에게 말론 malón(습격, 공격)을 하자고 했다. 마리아노 라고스는 주지사 gobernador에게 인디오들이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기 전에 문제를 풀어달라고,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당시 마푸체들의 대장격인 마닐 Mañil을 고발하자고 건의했다.
이것만 보면 마푸체와 칠레가 동등한 관계에 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처벌 없이 맘껏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쪽은 칠레인이 아니라 오히려 마푸체였다. 네쿨빌 Neculvil이 마누엘 세라노 Manuel Serrano에게 한 것처럼 마푸체가 폭력을 휘두르며 칠레인이 자기 땅에서 일하는 것도 방해하는 일 역시 흔했다. "인디오들이 성질나 있다.", "말론을 하려 한다."는 소문이 흔했고, 한 숩델레가도는 별 대단치도 않은 피뇨 Piño란 마푸체 족장을 다치게 해서 걱정이란 글을 썼다 피뇨가 칼푸코이와 피춘 Pichún을 불러 울트라비오비오의 정착민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뒤쪽 요새에 자리한 군인들이 이를 늦게 알아차린다면 정착민들은 마푸체에 쫓기며 산으로 언덕으로 달아나야 할 것이다. 나시미엔토 행정구역에서 찾은 문서들은 인디오들이 칠레인에게 손해를 입힐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1854년, 도둑을 찾던 칠레 당국은 미야피 Millapi를 죽였다. 마푸체 천 여 명이 산타 바르바라 요새 앞에서 시위하자 바스쿠냔 게레로가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칠레 당국은 미야피의 동생을 사로잡았고, 마푸체들이 미야피의 동생을 풀어 달라 하자 바스쿠냔 게레로는 거부했다. 그러자 전쟁 위협이 높아진다 느낀 비오비오너머 거주민들은 단체로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으나 대지주 J. A. 바스티다스만이 마푸체들이 할 약탈을 우려하여 그대로 남았다. 바스티아스의 집에 찾아온 마푸체들은 왜 에스파냐 사람(칠레 사람)들이 달아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였고,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야피의 죽음에 대해 마닐이 소식을 들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시 불안감이 칠레인 변경사회를 감쌌다.
거의 온 칠레가 바스쿠냔 게레로가 조국의 긍지를 지켰다며 미야피의 동생을 넘겨주지 않은 결정을 찬양했다. 하지만 칠레 변경민은 그렇지 않았다. 마푸체 사이에 이름이 있던 팔라빅치노 Palaviccino 선교사는 마푸체 하나가 죽이면 칠레인 100명이 죽을 수 있다며 게레로의 결정을 비판했다. 나시미엔토 시 주민은 야간 경찰력이 없어 밤에 습격받을 수 있다며 불안에 떨었고, 1853년, 변경 신문은 마푸체들이 "나시미엔토에는 고양이 네 마리 밖에 없다."며 병력이 적은 것을 비꼰다고 우려를 드러냈다. 그리고 1854년, 바스쿠냔 게레로는 한 마푸체 회의에서 수확만 끝나면 모든 칠레인을 내쫓자는 의견이 박수를 받았다며 경고했다.
하지만 산티아고 행정부는 윗사람답게 행동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7년 전엔 행정관이 마푸체를 그리 다루면 안 된다고 말했던 안토니오 바라스 Antonio Varas마저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 마푸체를 강경하게 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행정관에게 마푸체가 마음대로 집회를 하지 못하게 하고 진짜 필요할 때가 아니면 허가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바스쿠냔 게레로는 집회를 막으려 해도 열릴 것이라며 반론을 이야기했지만 산티아고에서 오는 지시는 한결같았다. 변경의 언론인 페드로 루이스 알데아 Pedro Ruiz Aldea는 마푸체 지도자 마닐은 그저 예의상 회의를 해도 되겠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정부가 이를 막으려 하자 "산티아고에서 국회의원들이 모일 때는 나한테 보고서 내고 허가를 요구했느냐?"라고 되물었다고 알렸다. 게레로는 사실상 변경의 행정관은 마푸체 추장들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아라우코 행정관 바스쿠냔 게레로가 "땅"(마푸체 땅)에 들어가려 했을 때 마푸체들이 보인 태도로 잘 드러난다. 게레로는 안토니오 라빌룩치 Antinio Lavilucci에게 자기가 간다는 소식을 마닐에게 알리도록 했다. 마닐은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했지만 해변 마푸체 사이에선 게레로에게 다른 목적이 있으며 사실은 마푸체 땅에 새로운 칠레 요새를 세울 자리를 보러 오는 것이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교사의 말대로라면 "땅"더 안쪽에서도 해안 지역 마푸체들에게 무력을 써서라도 게레로가 쿠파뇨 강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권고를 보냈다고 한다. 결국 게레로는 나중에 군대를 끌고 오기 위해 그 주변을 배를 타고 둘러보는 것 밖에 하지 못 했다.
변경은 마푸체 문화가 지배했다. 피콜투에 Picoltué의 숩델레가도는 호세 노람부에나 José Norambuena의 부인에게 일어났다는 일을 보고했다. 어느 날 몇몇 인디오가 노람부에나의 집에 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돌아가다 여자 한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인디오들은 노람부에나의 부인이 마녀라 마술을 부려 자기들 여자를 죽게 했다면서 부인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말았다. 이는 변경이 마푸체 문화의 지배를 받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토지 구입 문제다. 사고판다는 것은 양쪽이 다 동의했을 때 이야기인데 마푸체 땅 사기에선 그런 동의가 사실상 없었다. 마푸체 한 명을 그 마푸체가 읽지도 못하는 글자뭉치 앞에 앉혀 놓고 아무 싸구려 물건이나 줘가면서 "시" sí (그래.)라고 말하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땅 문서를 얻어내는 거하고 마푸체 보고 "판" 땅에서 나가라고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우리는 이미 호세 마리아 세풀베다 담당관이 겪은 일을 앞에서 보았다.
실제 소유자가 꼭 되는 것도 아닌데 왜 땅을 "샀는가?" 그렇게 하면 자기 동포들 앞에서 지주 행사를 할 수 있었고, (칠레) 법으론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천 헥타르나 지닌 지주가 될 수도 있고, 자기는 멀리 살면서 마푸체 사이에는 사는 칠레인들에게 그 땅을 경작하게 할 수도 있다. 마푸체는 그런 칠레인에게 수확 일부를 요구할 것이며 칠레인들을 쫓아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양 쪽에 다 남는 장사였다.
1856년에 바스쿠냔 게레로가 보낸 문서 하나엔 칠레 법관이 마푸체 콜리체오 Colicheo에게 질문을 한 내용이 나온다. 법관은 콜리체오에게 칠레인에게 소유권을 주었냐고 묻고 쿨리체오는 그런 적 없다고 한다. 콜리체오가 어떤 종이에 끄적인 건 사실이지만 술에 취해 있을 때였고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것이 마푸체 토지 "판매"의 실상이었다.
마푸체 가운데 권력이 큰 자들의 의견은 어땠을까? 팔라빅치노 선교사는 마닐이 1854년에 칠레인들을 모조리 몰아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마닐은 칠레인들이 비오비오너머 지역 거주지를 요새화하고 있고 정당한 토지 판매란 것도 일어난 적 없으니 모조리 내쫓겠다고 하였고 선교사는 그런 일은 "만행"이며, 아무리 판매가 없었다 해도 칠레인들은 땅을 얻기 위해 돈을 많이 썼으며 이들을 쫓아내려 하면 피 튀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마닐을 말렸다. 마닐은 결국 양보하고 더 많은 마푸체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해 집회를 열기로 했다. 팔라빅치노 선교사는 칠레인의 침투를 겪으며 마푸체는 땅을 지키는 데 더 관심이 만하졌고 이젠 사기로 하는 거래에라도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침투는 칠레의 확장을 뜻했다곤 볼 수 없으며 기껏해야 그 기반을 놓은 것이라고만 평가할 수 있다. 칠레인들은 마푸체에 동화되고 있엇고, 마푸체들은 칠레인들의 수확물을 받으면서 부자가 되거나 칠레인 소작농까지 부렸고, 어떤 이들은 이들이 조용히 있기를 바라는 칠레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니 단지 침투해 온 이들을 단지 칠레인이라고 쫓아내자고 하면 반대하는 마푸체도 많았을 것이다.
침투 상황에선 비오비오너머 칠레인들이 마푸체에 동화되거나, 칠레인이 거의 모든 토지를 독차지하여 마푸체를 마푸체 땅 더 안쪽으로 쫓아내거나, 마푸체가 칠레인을 쫓아낼 수 있었다. 실제로 1859년에 둘째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침투는 토지 소유권이란 문제거리를 남겼고, 이는 칠레가 군대를 앙골로 파견하여 아라우카니아 완전 점령을 시작하는 일로 이어졌다.

평가: 호세 벵고아 José Bengoa는 1985년에 낸 책 마푸체 족의 역사 Historia del Pueblo Mapuche에서 마푸체가 어리석어서 토지를 헐값에 팔았고, 판다는 게 뭔지도 몰랐다고 썼다. 코르넬리오 사아베드라 Cornelio Saavedra가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3년 전에 논문을 낸 레이바는 마푸체가 그렇게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마푸체가 토지가 팔았다는 것이 사실은 칠레인들 사이에만 통하는 "소설"이었을 가능성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점에서 레이바는 벵고아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이 글 대로라면 칠레인들은 비록 사기를 치긴 했지만 당장에 마푸체에게 해를 입힌 것이 없다. 오히려 칠레인들이 마푸체들에게 상당히 많은 이익을 주었다. 따라서 뒷날 마푸체가 칠레인들을 내쫓은 것은 단순한 증오와 불안감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바가 내놓는 근거란 것이 거의 다 "좀 더 강경한 대응을 할 힘"을 주문하는 칠레 당국에서 나왔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레이바는 마푸체가 비오비오를 넘어온 칠레인들에게 언제라도 대규모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썼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공격이란 것은 1859년에 칠레 측 세력이 둘로 분열되기 전엔 일어나지 않았다, 마푸체도 칠레 무장세력이 두려워서 –팔라빅치노의 위협을 기억하라- 쉽게 비오비오를 넘어온 칠레인들을 공격할 수 없었던 것 아닌가? 오히려 술도 안 취한 멀쩡한 정신으로 피뇨와 미야피를 해치고 미야피 동생을 잡아가둔 건 칠레인들이다.

인용할 만한 부분: 다른 한편, 침투는 칠레인과 마푸체 개인 사이 이해를 통해 일어났을 것이며 마푸체에게도 상당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상당수는 땅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쉽게 부자가 되었고, 다른 이들은 평화롭게 있어주는 대가로 꾸준히 '배당금" (cupo)을 받았다. p. 53.

정체성 개념 잡기, 19세기 칠레에서 빠뜨리아과 나시온의 낱말 뜻 읽은 책과 논문

제목: 정체성 개념 잡기, 19세기 칠레에서 빠뜨리아과 나시온의 낱말 뜻 "Conceptualizar la Identidad: Patria y Nación en el vocabulario chileno del siglo XIX", en 19세기 칠레의 민족과 민족주의 Nación y nacionalismo en Chile. Siglo XIX, Santiago, Centro de Estudios Bicentenario, 2009. pp. 23-51

 

글쓴이: 가브리엘 시드 Gabriel Cid

 

이론 틀: 사람의 역사가 말을 만들며 말은 시간 속에서 모습을 바꾼다. 빠뜨리아 Patria(2013년 오늘날 한국에선 보통 '조국'으로 번역함)와 나시온 Nación(오늘날 한국에선 보통 민족으로 번역함) 또한 마찬가지로 역사 속에서 뜻을 바뀌어 왔다.

 

자료 근거: 다양한 정치인 및 언론인이 남긴 글, 통계 담당 공무원이 남긴 글, 에스파냐어 사전 따위.

 

요약:

1. 오늘날 빠뜨리아와 나시온은 정치와 사회를 이야기할 때 매우 중요한 낱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낱말이 19세기 이전에 어떤 뜻이었나를 보면 낱말 뜻이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했듯 말은 세계를 표현하며 세계에 일어나는 일을 설명할 개념을 빚어낸다. 역사가 말을 만들고 바꾸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런 전제에서 빠뜨리아와 나시온이란 두 말이 주로 18세기부터 어떤 뜻으로 쓰이며 뜻이 바뀌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네스토르 메사 비야로보스 Nestor Meza Villalobos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당시 빠뜨리아는 칠레에서도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이 1737년 사전에서 정의한 것처럼 "한 사람이 태어난 곳, 도시, 또는 나라" 를 뜻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대개 빠뜨리아 범위를 작게 잡았다. 18세기 말의 연대기 작가 비센테 카르바요 Vicente Carvallo는 카우폴리칸 Caupolicán(마푸체 지도자)에게 빠뜨리아는 (마푸체 땅 전체가 아니라) 필마이켄 Pilmaiquén이라 하였다. 18세기에 빠뜨리아 개념을 더 넓게 잡은 사람들은 이탈리아로 추방된 칠레 출신 예수회원들이었다. 이를테면 후안 익나시오 몰리나 Juan Ignacio Molina는 칠레를 빠뜨리아라 하였다.

에스파냐 제국 해체 바로 전에는 아메리카 전체를 빠뜨리아로 보는 모습이 보인다.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 Francico Antonio Pinto(1827-1829년까지 칠레 대통령)"칠레의 애국자"란 가명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문서에선 칠레인은 영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에 맞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도와야 하며 이는 한 정치 및 윤리 공동체에 사는 사람은 다 한 빠뜨리아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19세기 초가 되기까지도 빠뜨리아라는 낱말 뜻에서는 전혀 독립운동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정통왕조파 legitimista스런 씀씀이가 보일 뿐이다.

나시온도 1780년 에스파냐 왕립학회 사전에서 "한 지방, 나라, 또는 왕국의 모든 사람을 모아 일컫는 말"이라 한 것에서 보이듯 빠뜨리아와 뜻이 비슷했다. 하지만 몰리나가 마푸체가 한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한 나시온이라 한 것처럼 나시온 개념에는 문화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때 나시온은 외국인을 일컫거나 다른 카스트를 가리키는 데 많이 썼다. 이런 나시온은 국적 nacionalidad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18세기 나시온은 정치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했고, 칠레는 에스파냐 나시온의 일부일 뿐이었다.

2. 프랑수아 하비에르 게라 Franços-Xavier Guerra와 페르난데스 세바스티안 Fernandez Sebastían 이 지적했듯 히스패닉 세계의 혁명은 낱말 뜻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옛날 뜻도 순순히 사라져주진 않았고 새 뜻과 투쟁을 벌였다. 1810년에 호세 미겔 인판테 José Miguel Infante(칠레 정치인)는 에스파냐 왕조의 위기를 곧 나시온의 위기로 보는 글을 썼다. 독립혁명 지도자가 된 일부도 그랬다. 카밀로 엔리케스 Camilo Enríquez 수사와 후안 에가냐 Juan Egaña는 칠레를 에스파냐 나시온의 일부로 표현하며 칠레도 나시온의 다른 부분과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엔리케스는 나시온을 정치 공동체라고 했다.

그런데 정치 위기와 전쟁은 그런 정치 공동체의 범위를 칠레만으로 줄여 놓았고, 1810년과 1814년 사이에는 점점 나시온을 독립 이념과 연결하기 시작했다. 1812년 라 아우로라 데 칠레 La Aurora de Chile(칠레의 새벽빛)지는 본국에 얽매인 인민은 본국을 살찌우는 지방 내지 부동산에 지나지 않으므로 모든 민족은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하였다. 칠레를 점령한 에스파냐 군대를 무찌르러 안데스를 넘은 오히긴스 Bernardo O'Higgins (칠레 총독 암브로시오 오히긴스의 아들. 일명 칠레의 해방자다.)"내 행복한 빠뜨리아, 아름다운 칠레가 나시온 자리를 되찾는다."고 했다. 왕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칠레 나시온 의회는 나시온은 왕보다 크며 왕은 나시온의 하인일 분이라 선언했다. 엔리케스는 프로빈시아 Provincia(한국에서는 보통 지방, 주로 번역한다.)를 강한 나시온으로 만들자고 부추겼다.

빠뜨리아도 뜻이 바뀌며 공화주의 정치전통에 연결되기 시작했다. 물론 빠뜨리아에서 영토를 일컫는 성격도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1813년에 오히긴스는 칠레인이면서 에스퍄냐 편에서 싸우는 사람을 비난했다. 빠뜨리아는 아메리카를 뜻하기도 했다. 1817년의 한 소책자는 개인은 아메리카라는 빠뜨리아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빠뜨리아의 "진정한" 뜻을 놓고 갈등이 일어났다. 1812년 호세 데 이리사리 José de Irisarri는 빠뜨리아를 태어난 곳,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라 보는 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며 빠뜨리아는 사실 평등한 법이 있는 한 정부에 모여 사는 사람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까밀로 엔리께스는 빠뜨리아를 정치 자유 및 시민정신과 연관지어 빠뜨리아가 있으려면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자기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오히긴스도 빠뜨리아를 자유 및 독립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고, 후안 에가냐는 식민지란 빠뜨리아 이전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빠뜨리아란 자유이며 왕립학회 사전에 나온 빠뜨리오따 patriota1817년에는 1780년대의 단순한 '동포'란 뜻이 아니라 공화주의 이념을 지키는 '애국자'를 뜻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 빠뜨리아는 이미 칠레를 뜻했다. 그러나 비센테 페레스 로살레스 Vicente Pérez Rosales 19세기 초에 빠뜨리아는 칠레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절대왕정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 원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한다.

3. 1827년 클라베 Clave 지에서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사는지 잊지 마. 우리는 나시온의 창조자들이다.”하고 말했듯, 1818년에서 1833년 사이 칠레 지배층은 나시온을 제도화하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이를테면 클라베 지는 1827년에 칠레인을 일컬어 에스파뇰(에스파냐 사람)”이란 하는 것을 금지하고 칠레노(칠레 사람)”이란 말을 쓰게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22년 헌법은 칠레 나시온은 모든 칠레인의 연합이며 주권은 칠레 나시온의 것이다. 칠레 나시온은 주권을 이 헌법에 따라 대표들에게 맡긴다.”며 칠레 민족의 뜻을 법으로 정했다. 1828년 헌법 역시 칠레 나시온은 칠레 태생이거나 법으로 칠레인인 모든 사람의 정치 연합이다.“라고 정의했다. 나시온을 시민들의 계약으로 뜻풀이하는 것은 칠레 뿐만 아니라 독립 직후 거의 모든 라틴아메리카 공화국에 공통된 현상이었다. 나아가 1833년 헌법 초안을 만든 안데르세 베요 Andres Bello한 나시온 또는 에스타도 estado(오늘날엔 흔히 국가로 번역한다.)는 계약으로 단결한 사람들의 행복과 안정을 추구한다.“고 써 나시온과 에스타도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칠레 나시온이 모든 칠레인의 연합이란 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던가, 칠레 나시온은 에스타도에 앞서 존재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었지만 1830년이 되면 이미 나시온은 시민연합이자 국가와 같은 것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모호하고 관념적인데다 작은 고장만 일컫는 일이 잦아 중앙집권을 방해하고 애국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던 말, 빠뜨리아에도 법의 손길이 닿았다. 1824년 라몬 프레이레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공식 선언문 속의 빠뜨리아란 낱말을 칠레로 바꾸도록 하였다.

4. 1830년대 말 페루-볼리비아 연방과 전쟁에서 이기면서부터 칠레에서 나시온에 문화공동체란 뜻이 깃들기 시작했다. 칠레 대학 설립 움직임과 함께 나타난 1842년 세대 la generación del 42도 분명 그런 모습을 보였다. 호세 빅토리노 라스타리아 José Victorino Lastarria(칠레의 자유주의 정치가, 작가)는 칠레 나시온은 정복자, 원주민, 지형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정의도 복잡한 것이라 주장했고 에스파냐가 지배한 과거를 비판하고 외국 이론에 바탕을 두고 역사를 써내려갔다. 하신토 차콘 Jacinto Chacón(칠레 지식인이자 정치인)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안드레스 베요 Andres Bello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출신의 칠레 교육자, 지식인, 정치인. 1829년에 칠레로 이주했다. 칠레 국립대학 첫 학장으로 1842년 세대는 모두 베요의 제자다.)는 이렇게 외국이론을 무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격렬히 비판했다. 베요는 모든 나시온에는 지역의 자연물만큼이나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오 가르시야 레예스 Antonio García Reyes 또한 모든 나시온에는 하느님이 정한 사명이 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1850년이면 이미 파리에서 나온 사전에서도 나시온을 "한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의 모임 또는 총합으로 한 법률의 지배를 받든, 여러 다른 정부를 인정하든, 대개 한 언어를 함께 쓰며 그 언어에 따른 특색이 있다."고 정의했다. 에릭 호스봄 Erci Hobsbawm이 이런 정의는 히스패닉 세계에서 1880년 이후에나 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1840년대에는 나시오날리스모 Nacionalismo란 낱말(현대 한국어는 보통 '민족주의'로 번역한다.)도 나타났다. 초기에 나시오날리스모는 경제정책 성격이 있는 말이었다. 자유주의 지식인 프란시스코 빌바오 Francisco Bilbao"유럽의 완벽함에 맞선 나시오날리스모 찬양은 강요로 밖에 되지 않는다."며 나시오날리스모를 비판한 데서 볼 수 있듯 나시오날리스모는 나시온의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뜻했다. 이 시기에 빠뜨리오띠스모도 나시오날리스모와 거의 같은 것을 뜻하게 되었다. 빠뜨리오띠스모가 시민정신보단 자기 나시온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뜻하게 된 거이다.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칠레 사람도 많았지만 이런 빠뜨리오띠스모를 이성을 잃고 칠레 것만 사랑하는 병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1879년 들어 빠뜨리오띠스모를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칠레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칠레의 혈통과 문화를 찬양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흐름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물론 이를 빠뜨리오떼리스모 Patrioterismo, 즉 엉터리 빠뜨리오띠스모라고 비판하는 대한 반발도 잇따랐다.

그러나 이런 상류층의 빠뜨리아니, 나시온이니 하는 말이 하층민에 쉽게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1861년에 한 관찰자는 칠레 우아소(Huaso: 말이 있는 하층농민)들은 칠레가 무슨 외국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전했다. 1854년 인구 조사를 맡은 한 관리는 수많은 사람이 나시오날리닫(국적) 란에 (칠레는커녕) 자기 주 이름도 아니고 동네나 농장 이름만 적었다고 기가 막혀했다.

한편으론 빠뜨리아와 나시온은 좁은 칠레 하나가 아니라 온 인류 또는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뜻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특히 후자는 1860년대에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와 확장주의에 반대해 일어났으며 호세 빅토리노 라스타리아, 도밍고 산타 마리아 Domingo Santa María, 알바로 코바루비아스 Alvaro Covarrubias, 벤하민 비쿠냐 막켄나 Benjamín Vicuña Mackenna등이 적극 참여했다. 다른 한편으론 인종 Raza 구분과 빠뜨리아 개념은 자연스럽고 신성하다면서 아메리카 주의와 나시온 개념을 조화하려던 마누엘 까라스꼬 알바노 Manuel Carrasco Albano같은 사람도 있었다.

5. 19세기 초에 나시온이 정치공동체냐 자연스런 문화공동체냐를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면 20세기 초에는 나시온이 정말 있냐를 놓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한 쪽에선 특히 교육자들이 빠뜨리오띠스모 이념을 교육으로 널리 퍼뜨리고 굳건히 하자고 하였고, 다른 쪽에선 사회주의자들,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나시온은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낸 거짓밀이라고 반박하였다.

나시온을 지지하는 파에선 이미 19세기 말, 1893년에 산티아고 사범학교 부학장 호세 M. 무뇨스, José M. Muñoz는 빠뜨리아는 모든 사람과 가족의 어머니이므로 나시온의 역사 교육을 새로 구성해 나시온의 영웅과 국기와 문장과 국가와 그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반대파에선 아나키스트인 알레한드로 에스코바르 Alejandro Escobar1898년에 빠뜨리아나 빠뜨리오띠스모는 이해관계가 걸린 계급이 오랫동안 머리를 써 벌인 작업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속임수, 거짓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보았듯 개념의 역사로 빠뜨리아와 나시온을 살펴보면 칠레 민족 정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낱말 뜻을 자기가 바라는 쪽으로 바꾸거나 지키려는 싸움도 볼 수 있고 거기에 대한 반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생기고 바뀌는 바탕 위에서 정치 선언이나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평가: 개념사 쪽에서 빠뜨리아와 나시온이란 낱말 뜻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거기에 따란 갈등으론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다룬 글이다. 이런 낱말 뜻을 두고 어떤 다툼이 벌어졌는지를 보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나 칠레 공화국을 세운 이들이 나시온의 뜻을 법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거나, 19세기 중반까지도 자기 국적을 자기 동네 이름으로 생각하는 서민이 많았다는 것을 보면 '독립운동가'들이 대중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후반부에 나오는 아메리카 주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던 저 지식인 상당수가 마푸체의 땅을 빼앗는 덴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오늘날에도 상당수 마푸체 민족주의자들은 비쿠냐 막켄나를 증오한다.

그러나 사전을 주요 자료 중 하나로 삼으면서도 사전을 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고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따지지 않은 것은 좀 안타깝다. 구스타보 파베론이 지적했듯 사전에 실리는 낱말 뜻풀이도 절대 중립이라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인용할 만한 부분: 까라스꼬 알바노의 독특한 점은 알바노가 나시온의 정체성과 아메리카 주의가 함께 갈 수 있다고 봤다는 점이다. 사실 알바노가 아메리카 의회를 세우자고 한 것이 바로 "남아메리카 나시온"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알바노는 이 나시온을 "에스파냐 인종" Raza Española라 하여 미국 즉 앵글로색슨 인종 Raza Española 의 확장주의에 맞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p.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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