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리 앙투인 1세의 유언 역사

아라우카니아에 여러 마푸체 롱코들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칠레 정부에 붙잡혀 강제송환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프랑스 사람이 죽음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며 남긴 문서입니다. 프랑스어에서 스페인어로, 스페인어에서 한국말로 한 중역이니 좀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용한 건 칠레의 Valente Editores에서 2005년에 낸 책 Orille Antoine I Rey de Araucanía y de Patagonia Su asunción al trono y su cautivero en Chile에 나온 내용 중 일부를 번역한 것.

칠레 역사에선 흔히 이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만, 납치 당시 칠레 정부는 오르리 앙투안이 프랑스 정부 나폴레옹 3세의 야심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심각한 위협으로도 보았습니다. 이 자를 축으로 마푸체들이 프랑스 무기를 들여와 저항하지 않을까, 프랑스가 마푸체를 발판으로 삼아 남아메리카에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1861년 프랑스가 멕시코에 쳐들어온 사건을 생각하면 의미 없는 두려움은 아니었을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때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며 아메리카 동맹 따위를 생각한 자들 중에 아라우카니아 침략은 적극 찬동한 이들도 있다는 겁니다.

이하는 번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곁에선 모두 내가 처형당할 것이란 말 뿐이니 여기서 내 정치에 대한 유언을 남기는 것이 내 의무일 것이다.  

, 오르리 앙투안 1(Orllie-Antoine I)세는 독신이다. 프랑스 도루도뉴(Dordogne) 지방, 페리귀(Périgueux) 구역, 오트포르(Hautefort) 칸톤(행정 구역), 슈르냑(Chourgnac) 구의 라세즈(La Chaise)라 하는 곳에서 1825 5 12일에 태어났고, 하나님이 내리신 복과 백성의 뜻으로 아라우코 민족과 파타곤 민족의 왕이 되었다.

짐은 1860 11 17일에 제정한 우리 법률을 발파라이소에서 발행하는 신문 엘메르쿠리오의 12 29일 판에 공포하였다. 우리는 그 법률에서 아라우카니아에 입헌군주정을 세우며 그 왕위는 영구히 내 자손에게 상속됨을 알렸다. 내 자손이 없을 때 왕위는 뒷날 정할 규칙에 따라 내 방계 가족이 물려받는다.

우리는 같은 달 20일 법률에서 파타곤 민족의 동의를 얻어 파타고니아를 우리 아라우카니아 왕국에 편입하였으며 아라우카니아와 동일한 헌법을 부여했다.

지난 12 25, 26, 27, 30일에 걸쳐 진행한 회의에는 레비우, 비야빌, 구엔트콜이 이끄는 부족 및 아라아코 민족과 파타곤 민족의 대표를 맡은 다른 우두머리들이 참여하였다. 이 회의는 짐을 왕으로 선포하고 앞서 이야기한 법령을 승인했다.

칠레 정부는 짐이 왕위에 오른 것을 알고 짐의 자유를 빼앗기로 하고 짐의 통역관과 시종들을 꼬드겼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지점으로 이 달 15일에 짐을 유도해 기습하게 하는 배신을 저질렀다.

이 비열한 간섭은 외세가 저지른 것이며 막 짐을 왕으로 인정한 원주민들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일은 원주민들이 짐에게 수여한 권리를 전혀 해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짐의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 같으니 오늘부터 계승권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 짐의 의무일 것이다. 아라우카니아와 파타고니아의 왕좌를 내 후계자들이 잇게 할 것이다.

짐의 친애하는 아버지 장 드 투넹(Jean de Tounens)이 계승 1 순위, 그 분이 계승하지 않을 때에는 짐의 아들은 아들 장 드 투넹(Jean de Tounens hijo), 아들 장 드 투넹도 왕위를 잇지 않을 때에는 그 아들은 아드리앙 장 드 투넹과 그 직계 후손들이 영구히 왕위를 잇는다.  

짐의 사랑하는 사촌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그 핏줄이 끊길 때엔 그 자리를 자매인 짐의 사랑하는 사촌딸 리다 잔 드 투넹(Lida-Jeanne de Tounens)과 그 직계 후손이 잇는다.

리다 잔 드 투넹조차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 그 핏줄이 끊길 때엔 짐의 둘째 동생과 그 후손의 직계로 영구히 왕위를 물려준다.

계승권이 높은 쪽이 죽고 핏줄이 끊길 때에는 짐의 셋째, 넷째, 다섯째 형제와 그 자손들 역시 동일한 권리를 누린다.

같은 핏줄에선 늘 남성 계승자가 여성 계승자보다 더 높은 계승권을 누린다.

짐의 다섯 형제들의 핏줄이 모두 끊길 경우엔 짐의 사랑하는 세 자매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권리를 물려받는다.

 

오르리 앙투안 1세 서명

1862 1 25일 로스 앙헬레스 감옥에서 작성.


마푸체 말 강좌 2 마푸체 말 배우기

아주 오래간만에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마푸체 말 강좌 2를 싣습니다. 지난 번에는 괜히 한글로 표기를 적어 봤는데 아직 쓸만한 표기법을 개발 안 한 상황에선 무리란 생각이 드네요. 이제부터는 표기를 Kom kim mapudunguaiñ waria mew에서 당당하게 베끼도록 하겠습니다. 저자한테 승락 받았어요. 참고로 이 표기법은 Mapuche unificado라 합니다. 뭐 이 정도까지 관심 있는 분은 거의 없겠지만요.

오늘은 간단하게 "~는 ~가 아니다"와 기본 동사 쓰는 법을 배워봅시다. 그리고 숫자도요.

지난 번에 "나는 한국인이다.'를 Inche Koreano라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는 어떨까요? 이것도 쉽습니다.

Inche koreano no.

당연히 '나는 마푸체가 아니다."도

Inche mapuche no로 쓰면 됩니다.

"그 사람은 마푸체가 아니다."도 그냥 Fey mapuche no라 하면 됩니다. 

"너는 사람이 아니야"는 Eymi che no라고 해 주면 됩니다(...).

다음으로 마푸체 동사를 이야기해 봅시다.
마푸체 말의 동사는 원형이 모두 n으로 끝납니다. Pingen(이름이 ~다, ng는 우리말의 받침 o처럼 읽습니다.), pin(말하다, 생각하다), pen(보다), lelin(바라보다), amun(가다), küpan(오다, Ü는 우리말의 으 비슷하게 읽습니다), tripan(나가다), akun(도착하다), nien(가지다), allkun(듣다), kimtekun(이해하다), kimün(알다), kuretun(마누라를 잡다, 섹스하다), datun(치료하다), languen(죽이다)처럼요. tuwün(~에 살다)처럼 모두 n으로 끝납니다.

마푸체 동사는 기본형이 과거 또는 현재를 나타냅니다. 딱 짚어서 현재 하는 일을 나타내는 법은 다음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동사 어근은 여기서 n을 빼면 됩니다. 그리고 n을 뺀 다음엔 이렇게 변화합니다.
               단수               복수(2명)         복수(3명 이상)
1인칭     pingen            pingeyu              pingeyiñ
2인칭     pingeymi         pingeymu           pingeymun
3인칭     pingey             pingey engu      pingey engun

1인칭    tuwün              tuwiyu                   tuwiyiñ
2인칭    tuwimi             tuwiymu                 tuwiymun
3인칭    tuwi                 tuwi engu              tuwi engun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오는 거지요.
내 이름은 도토리야. Inche dotori pingen, pingen dotori, inchen pingen dotori, 문법 상 순서는 별 상관 없습니다.

이름을 물을 때는 이렇게 합니다.
¿Iney pingeymi am?

자기 이름을 소개하고 상대 이름을 물을 때는 이렇게.

Dotori pingen inche. ¿Eymi kay?(내 이름은 도토리야. 너는?)

ka는 '그리고, 다른' 따위를 나타내는 밀입니다. Ka mapu라고 하면 다른 땅 또는 먼 곳을 나타내지요.

Inche tuwün ka mapu. 나는 먼 곳에 살아. Chew tuwimi? 너 어디 살아?

그럼 마푸체 숫자 몇 개만 외워봅시다. 정말 이걸로 끝입니다. 이번 강좌는요.

1 kiñe, 2 epu, 3 küla, 4 meli, 5 kechu, 6 kayu, 7 regle, 8 pura, 9 aylla, 10 mari, 20 epu mari, 21 epu mari kiñe, 22 epu mari epu, 30 küla mari, 40 meli mari, 50 kechu mari...100 (kiñe) pataka, 200 epu pataka, 221 epu pataka epu mari kiñe, 1000 (kiñe) warangka, 2000 epu warangka.

참고로 파타카(100), 와랑카(1000)은 루나시미, 즉 잉카제국 말에서 빌려온 말입니다.

그럼 다음에 봐요. 몇 사람이나 이런 언어 강좌에 관심 보일진 모르겠지만요 ㅎㅎ

페우카얄!





FTA 놓고 말싸움? 아는 게 있어야 말이죠. 이런저런 이야기

요즘 FTA 놓고 이런 저런 말이 많습니다.

그런 말싸움 한 켠 한 켠을 보고 싶으면 저도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만, 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죠. 그렇다고 협정문을 하나하나 다 읽고 우리나라와 미국의 법 제도를 다 비교해 보고 NAFTA로 나타난 산업효과를 캐나다, 미국, 멕시코 하나하나 다 뒤져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게으르기도 하고 책 읽는 게 워낙 느려서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공부해서 나름 뭔 '결론' 비슷한 게 나더라도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바보 멍청이가 된 느낌이랄까요. 하긴 언제는 똑똑했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신승리가 아니고 정신패배를 하자니 것도 참 찌지부리합니다. 이미 세상이 하는 '전문가'들의 일은 거의 다 제 손이 닿지도 않고 제가 쉽게 이해할 수도 없는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의무교육은 원래 뜻은 그런 걸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민들을 길러내어 민주주의 기반으로 삼는 거라던데 전 아무리 봐도 그런 민주시민은 못 되는 듯. 그저 언젠가부터 계속되어 온 '경제자유화' 이후 우리 집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 삶이 점점 더 쪼그라들어 가는 것을 보고, WTO건, IMF건, FTA건, 그게 EU하고 하는 거건, 칠레하고 하는 거건, 좋은 일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니 '선동'이던 '설득'이던 간에 FTA 반대주장으로 더 기울게 되지요. 물론 전혀 다른 것을 겪고 경험해 온 분들은 또 다르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그 어렵다는 경제학을 무식하게나마 독학으로 공부해 봐야겠단 생각은 듭니다만, 이런 무력감은 사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 같군요. 바야흐로 전문가의 시대, 내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는 일들에서 전문가가 아니고, 될 수도 없을 저는 슬픕니다. 이것이이 땅에 사람이 있은 이래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느껴온 세상의 참모습이겠지요.

이해할 수도 없고, 예측대로도 움직여주지도 않는 세상.

에이 왼쪽으로 누우나 오른쪽으로 누우나 언젠가 죽을 몸, 그냥 제 할 일이나 해야겠습니다.

메스티소란 개념 다시 생각해 보기 라틴아메리카 이야기


지난해에 마푸체 말을 연구하는 사람들, 마푸체 원주민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 모임에 나가 재미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열 사람 조금 넘는 사람이 빙 둘러 앉아 있는데 그 가운데 금발에 푸른 눈의 어르신이 한 분 보였습니다. ‘이런 곳까지 미국 인류학자가 와 있나? 아니면 독일이나 프랑스 사람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모임이 끝날 때까지 그 분의 ‘정체’가 정말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고 알고 보니 그 분은 마푸체였습니다. 마푸체 말을 유창하게 하고 마푸체 문화에서 자라온 마푸체였습니다. 이른바 라틴아메리카의 ‘인종구조’를 백인, 흑인, 원주민, 메스티소를 비롯한 여러 혼혈들로 생각하는 분들한테는 ‘백인 원주민’이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그 어르신은 마푸체 원주민일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는 혼혈이 많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하는 인종과 메스티소에 대한 단순한 담론 그 자체입니다.

이 메스티소 및 인종 이야기는 여전히 오늘날 우리가 라틴아메리카라 하는 지역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나라는 백인 비율이 몇 %고, 저기는 흑인 비율이 낮고, 저기는 생물학, 문화적 혼혈이 많이 진행되었느니 어쩌니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저만 해도 칠레에 역사학 공부를 하러 오기 전에 아는 다른 선생님께 “칠레는 백인 국가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칠레에선 자신들이 메스티소라고 주장한다. 거기다 백인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했을 때 이미 저는 메스티소니 백인이니 하는 것 자체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메스티소는 넓게 보아 이른바 ‘혼혈인종’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은 그 바탕에 ‘순혈인종’이란 것들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혈인종’ 같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습니다. 인류는 모두 한 종이며 생물학으로 구분할 수 있는 ‘인종’ 같은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신화일 뿐입니다.

왜냐면 종을 가르는 구분선은 서로 생식 가능한 자손을 남길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경우 ‘흑인종’과 ‘백인종’, ‘백인종’과 ‘황인종’, ‘황인종’과 ‘흑인종’ 사이에 난 자식은 병이나 돌연변이가 아닌 이상에야 다시 자손을 남기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이에 견줘 범과 사자는 확실히 다른 종입니다. 범과 사자 사이에 나오는 라이거나 타이온의 수컷은 생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피부 빛깔로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에는 그것이 절대 기준이 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곱슬머리냐, 곧은 머리냐, 평균 키가 얼마나 되느냐, 눈동자는 무슨 빛인가, 가슴에 털이 많은가 적은가 따위도 사회에서 합의만 된다면 얼마든지 인종 구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2차 대전 전부터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인종은 사회가 만들어낸 신화(social myth)다.”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 간단한 개설서 몇 권만 펴 보아도 “인종은 없다. 인종주의만 있을 뿐이다.”란 설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종주의에 대한 연구에서는 “혼혈”이란 개념은 “순혈인종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도 마찬가지 상식입니다.

라틴아메리카는 정복자들과 정복당한 원주민 사이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기에 특별하다는 이야기 역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입니다. 먼 곳에서 온 집단이 옛날부터 머물러 온 집단을 정복하고 그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는 것은 세계역사에서 전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배집단과 하층민 집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중간계층을 차지하게 되는 것도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입니다. 에스파냐의 식민지에 ‘메스티소’가 있었다면 우리한테는 양반과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판에 부딪쳐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요즘엔 문화의 혼종을 이야기하는 흐름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라틴아메리카의 특수성으로 내세우기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혼자서 발달한 ‘순수한 문화’란 것이 없다는 것쯤은 당장에 중국식이 된 우리 이름 체계만 봐도 누구나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말에는 중국말, 일본말에서 온 낱말이 적지 않게 섞여 있으며 영어 낱말도 점차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불교 사원에 있는 산신각은 혼종 문화의 절묘한 예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싱크레티스모’ 현상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것만 같은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당장에 주자학조차도 역사를 따지자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고대유교와 불교의 ‘혼합문화’입니다.

이쯤 되면 “아니,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이냐? 그런 이야기쯤은 우리도 다 아는 이야기다.”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칠레는 백인 국가냐?”, “이 나라는 백인 비율이 몇 %, 메스티소 비율이 몇 %다.”같은 이야기들이 버젓하게 개설서에 실리는 현실을 보면 뭐가 어떤 게 맞습니다. 사실 라틴아메리카의 이른바 ‘혼혈’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현상 그 자체일 것입니다. 우리는 몽골제국의 부마국 시절의 고려 왕가를 놓고 혼혈 왕가라 하지 않고, 위구르인 귀화 가문이 있어도 그 사람들을 ‘메스티소 가문’이라 하지 않는데 왜 라틴아메리카 연구에서는 그렇게도 메스티소, 메스티소를 들먹이는 것일까요? 서얼과 같은 사회계급이 아니라 ‘혼혈인종’, ‘혼혈문화’로서 말입니다. 메스티소에 특별한 것이 있다면 바로 메스티소를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메스티소’란 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점은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메스티소 개념은 심각한 오해와 문제점을 낳고 있습니다. 칠레에서 여러 원주민 친구를 사귄 제게는 그런 것이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칠레 신문에서 나왔던 “마지막 셀크남이 죽었다.”같은 주장이 있습니다. 마지막 ‘순혈’ 셀크남이 죽었으니 셀크남이란 민족은 이제 없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정작 저한테는 셀크남 친구가 있습니다. 예, 물론 ‘순혈’은 아닙니다만, 다시 말하자면 순혈이란 건 존재한 적도 없는 허구입니다. 마푸체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옵니다. 이제 ‘순혈’ 마푸체는 없으므로 마푸체는 이제 거의 다 사라졌고, 마푸체임을 주장하는 이들은 마푸체가 아닌 메스티소로서 사기꾼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원주민의 희생을 대가로 수많은 유럽 이민자를 받아들인 이른바 ‘칠레 민족’은 바탕부터가 ‘혼혈’ 민족으로서 아무리 ‘섞이더라도’ 민족정체성에 문제가 없는 집단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메스티소’는 그렇게 칠레에서 국가 내부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인종주의 주장은 원주민 집단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보기를 하나 들자면, 칠레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느 마푸체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 아가씨는 자신이 나중에 칠레 남자와 결혼을 하면 자식이 마푸체가 아니라 메스티소가 될 것이라며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전 그 아가씨에게 그것은 자식이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느냐는 문제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그 눈 파랗고 머리 노란 마푸체 어르신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원주민이 이런 생김새일 수 있는 것은 마푸체가 칠레에 정복당한 뒤 이른바 ‘백인’들과 통혼을 해서라고 것이라 생각하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푸체는 칠레 공화국에 정복당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에스파뇰라(에스파냐 여자)’들과 혼인하고 있었습니다. 보로아(Boroa 또는 forowe)란 부족은 배를 타고 가다 난파한 유럽인들과 혼인하여 유달리 금발벽안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합니다. 하지만 마푸체 사회에선 그런 혼인이 어떤 다른 사회계급이나 특별한 집단을 낳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도 역시 마푸체였을 뿐입니다. 칠레 역사학계는 이것을 거꾸로 된 혼혈(mestizaje al revés)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런 개념 설정 역시 메스티소란 말을 고집하는 데서 나오는 오류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메스티소’는 ‘백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나와야 ‘정상’이라는, ‘백인’을 남성, 원주민을 ‘여성’에 놓는 성차별 의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푸체나 원주민은 수많은 세상의 다른 집단들처럼 언어나 소속감 따위로 묶인 ‘상상의 공동체’이지 특정 유전자나 얼굴 모양의 묶음이 아닙니다. ‘백인’, ‘흑인’, ‘황인’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역시 그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거나 ‘순수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메스티소’에서 특별한 것은 그것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생각 그 자체이며,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상식’이자 ‘정론’이 되었고, 아직도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의 머릿속을 흐려놓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순혈’이며 동시에 ‘혼혈’입니다. 제2회 원주민 언어 대회(El segundo congreso de las lenguas indigenas)에서 라파누이 남성과 함께 살고 있던 어느 아주머니가 저와 이야기를 나눈 뒤 남겼던 말로 이만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나 순혈 맞아. 순혈 메스티소지!”

칠레 국제 책 박람회에 다녀왔습니다. 칠레 이야기

칠레에선 해마다 10월 후반에서 11월 초반에 걸쳐 마포초 역 가까이서 국제 책 박람회를 엽니다. 보고 싶으면 지하철을 타고 푸엔테 칼 이 칸토 역에서 내리면 바로 닿을 수 있습니다. 지난 해부터 이 전시회 참가한 나라들은 칠레는 당연히 있고, 볼리비아, 멕시코, 프랑스, 독일, 모로코, 튀르키예(터키, 토이기),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전시장으르 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해에도 이곳을 다녀왔습니다만 지난 해에 아직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독일어 책을 한 권 샀다는 게 다라면 올해는 좀 더 즐긴 것 같습니다. 첫째로 튀르키예 분들을 만나서 정말 몇 달 혼자 배운 말이 먹히나 말을 걸어봤는데 아주 반겨주덥니다. 한국 땅에서 터키 사람이 많이 싸우다 죽었으니 한국은 형제 나라단 말이 역시 나오더군요. 가끔 말이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듣기도 했지만 저한테 한 말은 모조리 이해했고, 제가 한 말도 그쪽에서 모조리 이해했습니다. 터키말 강좌가 있으니 함 와라, 깎아주겠다고 하던데 다음 해에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칠레 산티아고에 사는 터키 사람은 약 100명, 온 칠레엔 200명 정도 산다고 하네요. 한국 교민사회엔 종교 문제 때문에 너무 가까워지는 걸 꺼리고 있는데 친구나 좀 더 사귀면 좋을 듯 합니다.
둘째로 볼리비아 역사책을 두 권 샀습니다. 볼리비아는 올 해 특별 초청국이라 볼리비아 담당관도 다른 곳에 견주면 크고 이런 저런 책이 있었습니다. 재밌는 건 에보 모랄레스, 차베스, 카스트로를 다 묶어서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는 책을 버젓이 팔고 있더란 거죠.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있는 정부가 보낸 곳에서 이런 책을 내놓고 팔다니 '이런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운 너그러움인가? 아니면 우리 민주주의 이렇게 너느럽다능 하는 고도의 정치선전인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 밖에는 마푸체 현대사 책 하나 새로 나온 걸 샀습니다. 아는 대학 서점 아주머니하고 만나서 반갑다고 이야기도 하고 프랑스 책 담당 쪽하고도 잠시 프랑스 말로 떠들어 봤습니다. 괜시리 헛된 자만심에 가슴이 부풀더군요. 유치하긴 합니다만, 뭐 제가 이것 박에 안 되는 놈이니 이해해 주시길. 다음 해 행사는 어찌 될지 제법 궁금해 집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